考古学のおやつ 著作一覧

고구려토기 연구의 성과와 새로운 과제

高句麗土器研究の成果と新たな課題

出典:『고려대학교 개교100주년기념 박물관 특별전 한국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
(2006年,通川文化社)

韓国の高麗大学校で開催された展覧会「韓国古代のGlobal Pride,高句麗」のために執筆。時間がなかったために,集めた文献について日本語・韓国語混用のメモを大量に作成して一気につなげ合わせ,これをさらに筆者自ら全面韓国語に改作。入稿以降は篠原啓方氏らの尽力で韓国語を補正して掲載された。実際には表現を改めていただいた部分が多いものの,当該図録に訳者の名が欠けている。

挙げている参考文献は,執筆依頼の時点ではほとんど読んだことがなかったが,結果的に,高句麗土器について南北朝鮮と中国・日本の論文を大量に取り上げた珍しい論文となった(24/Jul/2006)

차레


머리말

고구려토기(高句麗土器)란, 고구려의 존속 기간중 고구려 사람들이 제작 사용한 토기로 이른 시기의 것은 거친 태토(胎土)를 사용하여 손으로 만들었는데, 중기 이후가 되면 주로 니질태토(泥質胎土)가 사용되어 물레로 제작되며, 유약을 바른 시유도기(施釉陶器)도 등장하게 된다. 특히 중기 토기는 문양도 시문된 것이 있다. 조형(造形)은 간소하면서도 실용적이며 후대의 옹기 공예에도 고구려토기의 형태가 계속 살아 있다.

고고학에서 토기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토기 제작에 있어서는 점토의 가소성(可塑性)을 이용해 빚어진 형태를 소성(燒成)을 통해 고정시킨다. 토기는 사용하면 파손되므로 사용 기간은 길지 않지만 파손해도 땅 속에서 썩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유적 발굴현장에서 거의 원래 모습대로 출토된다. 이러한 토기의 특성은, 고고학에서 중요한 편년이나 지역성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게다가 상세한 기법 관찰을 통해 토기 제작시의 匠人들의 행위를 복원하면 장인 개개인까지도 구분이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다.

토기는 분묘(墳墓)와 생활 유적에서 같은 기종(器種)이 이용되는 경우도 있어 성격이 다른 유적간의 시간적 관계를 알아볼 수가 있다. 또 기종마다 그 용도를 추측함으로써 유적의 기능이나 당시 생활상을 추정하는 일도 가능하다. 나아가 최근에는 자연과학적인 방법이 발달되어 생산지를 특정하거나 당시의 유통체계를 복원하는 작업도 시도되고 있다.

토기 연구는 일본, 그리고 남한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고고학자의 기량(技量)도 물론이지만 그 뿐이 아니라 유적(遺蹟)이나 유물(遺物)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통해 토기 한점마다 실측도, 사진, 설명이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고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보 공개와 유통이 필수조건이며 정보 공개와 유통이 진전된 일본과 남한에서 토기 연구가 발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본고의 주제인 고구려토기(高句麗土器)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지 겨우 20년 밖에 되지 않지만 고구려 연구에 불리한 조건에 있는 남한에서 특히 큰 연구성과가 이루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본고에서는 우선 고구려토기의 연구 성과를 회고하고 향후 연구의 단서가 되는 몇 가지 논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단 토기 기종 명칭이나 중국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고분 번호가 연구자마다 구구하기 때문에 보고에서는 토기 기종은 최종택(崔鍾澤)에 의한 분류 명칭(2003)을 부기하며, 집안 고분 번호는 『洞溝古墓群 1997年調査測繪報告』(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2)를 기준으로 하였다.


1. 高句麗土器 연구의 시작

(1) 日本人에 의한 연구의 시작

고구려 고고학은 일본제국주의 대외진출을 배경으로 주로 일본인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구려토기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진전되지 못하였다.

요시이 히데오[吉井秀夫]는 서일본(西日本) 지역에서 소장된 고구려유물의 유입 배경을 살펴보면서 고구려 고고학 연구가 일제시대 일본 연구자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 연구에 영향을 주었으며 고구려 유물이 골동품으로서의 대규모로 유통하였을 가능성을 추정하였다. 그리고 당시 연구자나 수집가의 관심이 기와, 특히 수막새기와에 치우쳤으며 그것이 이후 일본에서의 고구려 기와 연구의 기초가 된 한편, 토기 및 도기는 거의 일본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일본의 고구려토기 연구가 부진하였음을 지적하였다(吉井秀夫 2001).

해방 이전에 집안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한 바 있는 구로다 겐지[黑田源次]는, 일본인 고고학자에 의한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고구려토기를 개관하며, 토기 수량이 적은 점, 시유도기가 존재하는 점을 특징으로서 들어 ⌈유약을 바른 것⌋, ⌈회흑색 와질토기⌋, ⌈마연된 흑색 와질토기⌋, ⌈운모편 또는 활석 가루를 많이 섞은 회백색토기⌋, ⌈赤色瓦陶(적색 와질토기)⌋로 분류하였다. 이 중 ⌈운모편 또는 활석 가루를 많이 섞은 회백색토기⌋에 대하여는 집안에서 출토된 것은 물레가 사용되었으나 물레를 쓰지 않은 사례가 요령 석저자(遼寧 石岨子)에서 마제 석기와 함께 출토된 점을 지적, 이런 종류의 토기 기원이 고구려 이전에 거슬러 올라갈 것을 시사하였던 것은 선구적인 업적이다(黑田源次 1955: 183-185). 그리고 그는 고구려토기의 출토량이 적고 장식도 드문 사실로 보아 ⌈도자에 관한 한 삼국 중 고구려의 발달은 가장 늦지 않았을까 생각된다⌋라 하는 한편 고구려토기가 물레를 구사한 것을 중시하면서 벽화고분의 생활풍속도를 들어 물레 기술에 의한 목제품의 발달을 상정하였다(黑田源次 1955: 186). 고구려토기의 발달이 늦었다고 하는 견해에는 의문도 있으나, 토기 관찰을 통해 목제품의 발달을 읽어내고자 하였던 시도로서 흥미롭다.

구로다의 서술은 제한된 해방이전 자료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당시 연구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었지만, 선구적인 지적도 보여진다. 다른 연구자에게 거의 인용되지 않은 점은 아쉽다.

(2) 해방 후 중국북한에 의한 조사 성과와 공표

해방 후, 중화인민공화국을 구성하는 길림성(吉林省)요령성(遼寧省)이 된 압록강이북에서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으로 인한 중단시기를 제외하면 고구려유적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경위에 대해서는 이전복(李殿福)이 정리한 바 있다(1992). 그러나 이전복의 지적처럼 적석총(積石塚=돌각담무덤)이나 벽화고분 연구에 중점이 두어져 유물 연구가 부진하여 토기나 기와에 관한 연구도 매우 적었다.

북한에서도 해방 후 고구려유적들이 조사되면서 편년 등의 연구도 진행되었으나 토기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그다지 진전되지 않았다. 정찬영(鄭燦永)은 압록강 중류역의 고구려 적석총에 대해, 고분군의 입지와 구성, 고분 구조, 주체부 방향과 구조 등을 통해 분류하여 그 변천을 살펴보고, 각 형식의 분묘에서 출토된 토기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정찬영 1973). 이용할 수 있는 토기 자료가 적고, 토기 자체를 주제로 한 것이 아니었지만 초기 고구려토기에 대한 서술로서 귀중하다.

1972년, 중국에서는 잡지 『考古』와 『文物』 등이 복간되어 문혁(文革) 직전이나 문혁 중의 발굴성과가 속속 공개되었는데, 같은 해 일본과 중국은 국교를 수립하였고 일본에는 중국의 고고학 정보가 많이 소개됨으로써 일본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눈부신 발굴성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요령성 조양현(朝陽縣)의 북연 풍소불묘(北燕 馮素弗墓)의 발굴성과(黎瑤渤 1973)는, 일본 고분 시대 마구 연구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고고학이 극동의 고고학연구에 빠뜨릴 수 없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남한에서의 무령왕릉(武寧王陵, 1971년), 천마총(天馬塚, 1973년), 황남대총(皇南大塚, 1973-1975년)의 조사성과와 함께, 일본 고분연구는 아시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의 오카자키 다카시[岡崎敬]는 해방 후 중국북한에서 조사된 유적에도 언급하여 고구려토기를 개관하였는데, 토기자료는 이용할 수 있는 사진도면들이 부족하여 대부분 해방이전 자료에 대해 서술하였다(1979). 토기 분류도 ⌈유약을 바르지 않은 토기⌋, ⌈유약을 바른 토기⌋, ⌈竈(부뚜막)⌋라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약을 바르지 않는 토기⌋에 대하여 ⌈띠쌓기하여 물레조정한 것으로, 표면을 문질렀으며 와질인 것이 많다⌋고 한 것은, 고구려토기의 성형에 대한 물레 이용이 부분적이라고 지적한 점에서 중요한다.(岡崎敬 1979: 180).

남한에서는 김기웅이 처음으로 고구려토기 개설을 발표하였다(金基雄 1985). 남한에는 실물자료가 부족하였으나 중국북한일본의 보고서들을 구사하여 재질기종마다 많은 자료를 열거하였다. 이 시점에서는 오카자키(1979) 등 소수의 서술밖에 없었고 중국북한과의 교류도 한정된 상황이어서 귀중한 업적이었다. 김기웅의 업적에 의하여 고구려토기 개요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그 후 남한의 고구려토기 연구를 촉진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중국의 편년 연구 시작

중국의 경철화(耿鐵華)임지덕(林至德)은, 해방 후 보고 자료뿐만 아니라 집안현박물관(集安縣博物館)에 소장된 미보고 자료도 구사하여 길림성 집안지역의 고구려토기를 3조(組=시기)로 분리하였다(1984)(그림 1). 집안을 중심으로 한 편년이었으나 이전복・손옥량(孫玉良, 1990)이나 위존성(魏存成, 1994) 등에도 기본적으로 계승되었고 요령성 신빈현(新賓縣)에 있는 태자성(太子城, 撫順市博物館 1992)이나 환인현(桓仁縣) 고려묘자(高麗墓子) 적석총(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외 1998)에도 연대비정에 이용되고 있다. 다만 미보고 자료가 많아 제삼자가 검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이 논문은 오가타 이즈미[緖方泉]에 의해 번역되어 일본에서도 발표되었다(耿鐵華林至德 1987). 실측도가 새로 제공되어 축척 등도 정확하게 되었다. 더구나 원 저서에서는 편년표(高句麗陶器演變示意圖<耿鐵華林至德 1994: 62>)에 게재된 토기 출토지가 명기되지 않았는데, 오가타에 의해 출토지가 명기되었다(耿鐵華林至德 1987: 36-37).

이전복・손옥량은 남한에서 발표한 『高句麗簡史』에서 경철화・임지덕의 편년을 소개하며 지역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고구려토기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해설하였다(李殿福・孫玉良 1990: 170-173). 이 연구를 통해 경철화・임지덕의 연구 성과는 남한에도 소개되었다.

위존성은 집안지역의 봉토석실벽화고분(封土石室壁畵古墳)에서 출토된 사이전연호(四耳展沿壺, 최종택의 ⌈사이장경옹(四耳長頸甕)⌋)를 분류하고 봉토석실벽화고분의 변천관을 제시하여 변화의 방향성을 상정하였다(그림 2). 그리고 고구려 시유도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3세기 이전의 고구려 고분에는 시유도기를 볼 수 없는 것으로 보고 4세기에 평양 지역을 점령하여 낙랑 시유도기 기술을 흡수하였고, 그 후 4세기말부터 5세기초에 요하(遼河) 유역에 발전하면서 중원(中原)지역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시유도기가 발전되었다고 해석하였다(魏存成 1985: 84).

(4) 오가타 이즈미・아즈마 우시오의 연구

일본의 오가타 이즈미[緖方泉]는 해방 후 중국북한의 조사 성과를 최대한 이용하여 집안 고구려 고분의 편년을 구축하였다(1985a, b). 우선 해방 후 고구려 고분 연구의 문제점으로서, 적석총과 벽화고분을 따로 분류 편년하였으며 양자의 상호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였고(緖方泉1985a: 6), 사이호(四耳壺, 최종택의 ⌈사이장경호(四耳長頸壺)⌋와 ⌈사이장경옹⌋)의 형식 분류와 공반유물, 고분 구조, 벽화를 조합하여 I기부터 Ⅵ기까지 시기구분을 시도하였다(緖方泉 1985b). 이 시점에서는 가장 상세한 편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호 편년에 대해서는, 목(頸部)이 없고 구연부가 외반(外反)된 B형과 목이 직립하다가 구연부가 외반된 C형을 형식학적으로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B형 중 마선(麻線)0001호묘(오가타의 사이호 B-I형), 우산(禹山)1041호묘(B-II형), 산성하(山城下)0332호묘(B-III형)라고 하는 형식 서열은 약간 부자연스러우며 위존성(1985)과 같이 마선0001호묘, 산성하0332호묘, 우산1041호묘의 순서로 배열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인생활도(主人生活圖) 벽화가 있는 마선0001호묘와 우산1041호묘(오가타의 벽화 B-1형)가 이르고 산성하0332호묘(B-2형)가 늦은 것이라고 본 오가타의 견해가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緖方泉 1985b: 14).

曆年代 비정에도 당시의 한계가 있었다. A형 사이호(최종택의 ⌈四耳長頸壺⌋)가 출토된 고분에 대해서는, 허리띠나 쇠도끼를 근거로 4세기 전반에 비정하였는데(緖方泉 1985b: 12-13), 허리띠가 출토된 산성하 전팡편(磚廠片)0152호묘와 0159호묘, 쇠도끼가 출토된 산성하전창편0191호묘, 만보정(萬寶汀)0242호묘에서는, 모두 사이호가 출토되지 않았다(集安縣文物保管所 1983; 吉林集安縣文管所 1982).A형 사이호가 출토된 산성하 전창편0196호묘에서는 관(罐, 최종택의 ⌈심발(深鉢)⌋)이 출토되었지만, 변화가 적은 기종이고 산성하 전창편0152호묘에서 출토된 관과는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다(集安縣文物保管所 1983). 따라서 오가타가 든 이유만으로는 A형 사이호를 모두 4세기 전반에 비정할 수는 없으나 이 시점에서는 A형 사이호를 3세기 이전에 비정한 적극적인 근거도 또 찾아낼 수가 없었다.

오가타는 고구려토기 사이호의 편년안을 기초로, 신라의 경상북도 경주시 금관총에서 출토된 청동제 사이호의 부장연대도 추정하였다(緖方泉 1985c).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가 있다. 사이호를 편년하였을 때 오가타는 장천(長川) 2호묘(吉林省文物工作隊 1983)의 사이호를 C-I형으로 하여 금관총의 청동제 사이호도 C-I형으로 한 다음, 금관총의 연대를 450년-520년경으로 생각하는 이토 아키오[伊藤秋男]의 편년(1972)을 이용하여 고구려토기 사이호 C-I형의 연대는 이보다 소급되는 5세기 전반으로 하였으며(緖方泉 1985b: 6), 더욱이 마구 연대에 대해 논란이 많은 칠성산(七星山) 1196호묘에 대해 단지 형태가 사이호 C-I형에 가깝다고 하여 역시 5세기 전반에 자리매김하였다(緖方泉 1985b: 10). 그러나 금관총의 청동제 사이호를 논할 때는 이 논리를 역전시켜 칠성산1196호묘를 ⌈마구 등을 통해 5세기 전반에 비정하였다⌋고 하며, 이것을 C-I형 사이호의 연대에 옮겨놓아 금관총 축조 연대의 상한을 5세기 후반으로 한 것이다(緖方泉 1985c: 117).

1987년에 오가타는 경주시 호우총(壺杅塚)에서 출토된 동완(호우)에 대해 고구려의 동완, 토기(慈江道 時中郡 深貴里 8호분의 토기 합 등)에 유례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서 일부 벽화 자료도 이용하면서 동완 변천을 살펴보고 남부지방으로의 파급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이에 의하여 칠성한1196호묘의 연대도 논하였다(緖方泉 1987). 금속기나 벽화 자료를 토기편년에 이용하려고 한 시도이다.

이 외에도 그는 경철화・인지덕의 편년을 일본어로 번역, 발표하였다(耿鐵華・林至德 1987).

아즈마 우시오[東潮]는, 오가타(1985 a, b)나 위존성(1987)의 편년 연구가 진전되어가던 집안지역 뿐만 아니라 숙백(宿白, 1977, 1984), 장소주(張小舟, 1987) 등의 중국 동북지방 진묘(晋墓)・선비묘(鮮卑墓)의 편년도 활용하여 압록강 유역, 요하 유역, 대동강 유역을 대비한 편년을 구축하고 거기에다가 백제신라가야의 편년도 대비하였다(東潮 1988). 진묘・고구려묘・선비묘의 성격을 두루 가지고 있는 요령 본계묘(本溪墓, 遼寧省博物館 1984)에 대해서는 고구려묘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여(東潮 1988: 291-292), 편년과 지역간 대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토기편년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오가타의 편년안(緖方泉 1985b)에 의거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사이호 IIb형식(오가타의 B-II형: 우산 1041호묘)과 IIIa형식(C-1형: 장천2호묘)이 동시기에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점은 위존성의 견해(1985)에 가깝다.

노남리형토기(魯南里型土器) 등, 초기 고구려토기에 대해 고려되지 않고, 이 점은 이후 박순발에 의해 비판되었으나(朴淳發 1999: 13), ⌈고구려토기의 형성을 200년 이후로 보고 있다⌋는 비판은 적절하지 못하다. 아즈마의 제7도(東潮 1988: 287)가 200년부터 시작되어 있는 점은 오해받을 여지가 있으나 아즈마는 고구려토기의 형성 시기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으며 유물편년의 조기에도 ⌈3세기 이전⌋이라고 부기하고 있다(東潮 1988: 293).

아즈마는 그 후도 현지조사 등을 통해 자료를 추가하여, 1997년 그의 저서에서 성과를 피력한 바 있다(東潮 1997: 409-410)(그림 3).


2. 남한에 있어서 연구 시작과 발전

(1) 한강 유역에서의 고구려 유적의 인식

남한에서는 종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토기를 제외하면 실물 자료가 부족하여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1977년에는 한강 북안(北岸)의 고구려 유적인 서울 구의동유적(九宜洞遺蹟)이 발굴조사되었으나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백제 고분으로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오카자키 다카시는, 평양 부근 출토의 고구려 단지에 대하여, 당시 백제 유적이라고 생각되어 있던 구의동유적의 출토예와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岡崎敬 1979: 180). 같은 도록에서 ⌈백제의 토기⌋를 담당한 오다 후지오[小田富士雄]는, 구의동유적의 토기를 놓고 쌍이장동호(雙耳長胴壺, 최종택의 ⌈양이부장동옹(兩耳附長胴甕)⌋)가 고구려토기를 닮은 점을 지적하여 ⌈구의동고분 토기는 계보, 시기 등 앞으로 검토해야 할 문제를 많이 남기고 있다⌋고 지적하였다(小田富士雄 1979a: 187). 같은 해, 오다는 중국에서 보고된 우산68호묘(현재 고분번호 불명)와 칠성산 1196호묘(集安縣文物保管所 1979)를 일본에 소개하면서 더불어 고구려와 백제신라 유물을 대비하여 학설을 보강하였다(小田富士雄 1979b).

서울시 몽촌토성(夢村土城)의 연차적인 조사가 진전하자, 남한에서 고구려토기 연구에 중요한 전환기를 가져왔다. 특히 1988년의 성내 동남지구(金元龍 외 1988), 1989년의 성내 서남지구(金元龍 외 1989) 조사에서는, 적지 않은 양의 고구려토기가 인식되어 이로 인해 구의동유적의 출토예도 고구려토기로 추정되었다.

1988년 보고에서는 동남 지구의 모든 출토 토기를 외청색경질(灰靑色硬質)・회색연직(灰色軟質)・적갈색연질(赤褐色軟質)・흑황색니질(黑黃色泥質)의 네 가지 ⌈토기질⌋로 나누어 이 중 전3자는 석촌동(石村洞) 고분군에서 공반하므로 한 ⌈유형⌋이라고 보아 ⌈몽촌유형⌋, 후자를 구의동유적 출토 토기에 유사하므로 ⌈구의동유형⌋이라고 명명하였다(金元龍 외 1988: 74-75). 그리고 구의동유형 중 광구장경사이옹류(廣口長頸四耳甕類, 최종택의 ⌈사이장경옹⌋)의 유례가 고구려토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여 구의동유적이나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일련의 니질토기의 출자를 재검토해야 함을 지적하였다(金元龍 외 1988: 164-165). 나아가 1989년 보고서에서는 몽촌유형을 ⌈백제 토기⌋, 구의동유형을 ⌈고구려토기⌋라고 다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金元龍 외 1989).

한강 유역 고구려토기가 명확하게 인식됨에 따라 실물 자료에 근거한 고구려토기 연구가 남한에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더구나 최종택(崔鍾澤)은 구의동유적이 고분이 아니고 군사 요새임을 지적하여(崔鍾澤 1993: 3), 나아가 한강 북안에 위치한 아차산(峨嵯山)에서 구의동유적을 닮은 보루(堡壘)이 잇따라 확인됨으로써 연구에 비약적인 진전을 가져왔다.

필자는 몽촌토성의 백제 토기를 편년하였을 때, 유구의 공반관계가 시기를 반영할 경우가 있음을 지적하여 백제 토기에 설정한 각 형식에 대응하여, 같은 유구에서 출토된 고구려토기 중에도 형태 변화가 확인된다고 하였다(白井克也 1992: 72). 이 논문은 고구려토기 자체의 형식 변화를 논한 것이 아니고 구의동유적을 5세기 중엽으로 보는 등 문제가 있으며, 또 유구 내의 공반관계를 중시한 점 등에 대한 박순발의 비판(朴淳發 2001: 125-126)도 있으나 남한에서 출토된 고구려토기에 대해 시간에 따른 변화를 상정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2) 최종택의 고구려토기 연구

1993년에 최종택은 구의동유적의 모든 출토 토기를 재조사하였으며, 거기에 크기나 아가리 형태를 통해 각 기종을 분류하여 중국북한의 출토예와 대비하였다. 연대비정은 한강 유역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엽까지, 중심 연대는 5세기 중엽으로 추정하였다(崔鍾澤 1993). 더욱이 구의동유적 이외의 아차산이나 몽촌토성의 고구려토기도 포함시켜 미량원소분석(微量元素分析), 전자현미경 분석, 경도분석(硬度分析) 등의 자연과학적인 분석을 실시하며, 형태 분류에 의해 기존 논문과 같은 연대관으로 도출하였다(崔鍾澤 1995). 이러한 연구에 대해 양시은(梁時恩)은, 구연부 형태만에 의거한 단순한 편년이라고 하면서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활용한 점을 평가하였다(梁時恩 2003a: 6).

1997년에는 구의동유적의 보고서가 간행되면서, 고구려토기 연구 환경이 한층 더 갖추어졌다(구의동보고서 간행위원회 1997).

1998년에 최종택은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유물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 의의를 논하였다(1998). 그는 해석의 전제로서, 구의동유적 토기 연대를 경철화・임지덕의 편년(1984)에 의해 ⌈중심연대는 5세기 중엽경⌋으로 보면서 출토 유물이 다양하므로 연대폭이 크다고 생각하여 역사적 해석에 근거해 ⌈상한은 4세기 말엽, 하한은 6세기 중엽으로 비정⌋하였다(崔鍾澤 1998: 145). 또 아차산 일대 보루 등도 구의동유적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몽촌토성에 대해서는 광구장경사이옹(뒤의 ⌈사이장경옹⌋)을 5세기 중엽경에 비정하였고 475년의 한성 함락 사건과 일치한다고 하였다(崔鍾澤 1998: 155). 나아가 몽촌토성과 풍남토성(風納土城)의 고구려토기 출토량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몽촌토성은 풍납토성보다 군사적 성격이 강하다고 추정하고, 몽촌토성・ 구의동유적 출토 고구려토기의 기종 구성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토기 출현 이후는 한강 이북의 보루보다 ⌈비중있는 인물이 몽촌토성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崔鍾澤 1998: 155). 이 논문은 고구려토기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고구려토기 출토 유적의 성격을 추정한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편년의 근거가 역사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는 점이 이 시점에서의 연구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박순발은 한강 북안의 보루들을 475년 이전으로 한 최종택의 견해(1998)를 비판하면서 보루들이 불탄 채 발견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6세기 중엽 신라・백제군의 공격에 의해 폐절(廢絶)되었다고 추정하여 폐절 시기를 특정하였다(朴淳發 1999: 15-16). 그러나 이것으로써 보루 출토 토기의 연대가 6세기 중엽에 특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고구려 보루유적의 연대를 6세기 중엽경으로 이해⌋하는 견해(朴淳發 1999: 16)에는 바로 수긍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전쟁으로 인해 폐절된 성곽 유적에서는, 폐절 직전시기 유물이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므로 폐절 이전에 사용되고 있던 기간의 토기는 적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유적의 존속 기간에 대해서는 신중한 자료 조작이 요구될 것이다.

(3) 고구려 전역을 대상으로 한 토기 연구의 등장

1992년에 남한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여 중국 고고학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이용되게 되었다. 그 영향을 실감시키는 것이 박순발의 연구(1999)이다.

박순발은 이 시점에서 확인되어 있던 중국북한남한의 고구려토기 출토예를 가능한 한 연대순으로 배열정리하여 300년과 500년에 획기가 있었음을 지적하였다(朴淳發 1999: 13). 나아가 백제 한성기의 흑색마연토기와 고구려토기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부정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朴淳發 1999: 17).

한강 북안 보루의 연대를 특정함과 더불어 고구려의 전 시기, 전 영역에 걸쳐 토기를 살펴본 연구로서는 처음으로 공개된 것으로, 고구려 고고학이 동아시아의 고고학역사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가시화한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이어서 최종택은 한강 유역의 출토예에 중국북한의 자료를 더하여 각 기종의 새로운 형식 분류를 시도하였으며, 유적 연대를 이용하며 편년하고 한강 북안 보루의 연대관도 수정하였다(崔鍾澤 2003). 망라적이고 상세하며, 현 시점에서 가장 자세한 토기편년이라고 할 수 있다.


3. 고구려토기 연구의 다양화

(1) 북한에서의 토기 연구

1990년 이후 북한의 리광희는 고구려토기도기에 대한 연구를 잇따라 발표하였다. 북한에서는 보기 드문 고구려토기 연구로서 제작 기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먼저 1990년에는, 발표되지 않았던 자강도 만포시(慈江道 滿浦市)의 문악리(文岳里)1호분, 황해남도 안악군(安岳郡)의 안악 3호분의 시유도기를 소개하면서, 중국과 북한 지역에서 고구려 시유도기가 출토된 일곱 유적의 연대를 검토하였다(리광희 1990). 그 결과, 집안 만보정 1078호묘(吉林省博物館文物工作隊 1977)에서 출토된 예를 3세기 초 이전으로 보고 고구려 시유도기의 시작을 이 시점에 찾고자 하였다(리광희 1990 : 14). 그러나 적석총의 형태나 매장 주체부의 구조, 마구, 나아가 시유도기의 형태 등의 변화 과정에 대한 논리에 일관성이 없고 납득하기 어렵다. 적석총에서 석실 봉토분으로, 수혈식묘실에서 횡혈식묘실로 이행하였다는 고분의 구조 변화에 대해서도 너무 단순하게 취급하고 있다(崔鍾澤 2000: 243-244). 특히, 만조정 1078호묘에서 출토된 시유도기(보고서의 ⌈창구전연호(敞口展沿壺)⌋)에 대해 ⌈아직 손잡이가 없⌋다고 하였으나(리광희 1990 : 11), 이 단지는 파편으로 출토되었고 리광희가 참조한 보고서에서도 그림이 없어서 ⌈질그릇 단지를 마선구 1호묘이나 장천 2호묘 출토품과 대비하면, 이 무덤 출토품이 아가리의 벌어진 정도가 비교적 적다⌋(吉林省博物館文物工作隊 1977: 124)라는 서술뿐, 네 귀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적절하지 않다. 게다가 리광희는, 네 귀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아직 4개 손자비가 보급되지 않던 시기의 것⌋으로서 만보정 1078호묘의 예만을 극단적으로 이른 3세기 초 이전에 자리매김하고 있어(리광희 1990 : 12) 논리에 문제가 있다.

그러한 문제를 제외한다면 리광희의 논문에서 중요한 것은 안악 3호분에서 보고되지 않은 시유도기(단지와 접시)가 출토되었다고 명기한 점이다(리광희1990 : 10). 안악 3호분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도 4세기 중엽의 분묘임은 분명하며 여기서 출토된 시유도기는 상당히 이른 시기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리광희는 1991년에 고구려 시유도기가 성립 당초부터 높은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유된 기종들이 증가하고 시유도기를 사용한 계층도 차차 일반 평민까지 확대되며 유약 종류도 많아졌던 점 등을 주장하였다(리광희1991a). 그러나 앞의 논문에서의 연대관에 문제가 있으므로 이러한 변천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더구나 일반 평민으로의 보급으로서 제시한 세 분묘 중 요령성 무순시(撫順市) 전둔(前屯)15호묘는 ⌈무덤 15에서 부서진 단지가 출토되었다⌋라 하여 시유도기의 출토는 보고되지는 았았으며 전둔13호묘, 와혼목(窪渾木)2호묘는 석실이 작기는 하나 도저히 일반 평민의 분묘로 보이지 않는다(王增新 1964). 그 외에도 일반 평민에게 보급된 예로서 대성산성(大城山城) 등의 생활 유적의 예를 들었으나 증거로서는 충분하지 않다. 다만 분묘 외에 시유도기의 출토예를 명시했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 한다. 그 후 중국이나 남한의 연구에서는 리광희의 이러한 지적이 활용되어 있지 않다.

나아가 리광희는 고구려토기의 장식무늬(문양)를 기법으로 크게 구분하여 의장(意匠)으로 세분화하였다(1991b). 고구려토기의 시문기법을 논한 연구로서는 귀중하다고 하겠으나 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기형, 출토 상황, 공반유물 등을 검증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무늬 분류에 대해서는 그 후 남한의 최종택도 시도한 바 있다(2000: 254-255).

김영진(金榮搢 1998)은 발해 도자기가 고구려 도자기를 계승한 것임을 논하였다. 그 이유로서 기종 구성의 공통성, 무늬 등 장식 기법의 공통성, 발해 삼채(三彩)가 당삼채(唐三彩)와 다르고 고구려의 시유도기와 유사한다는 세 가지를 들고 있다. 특히 발해 삼채의 기원이 당삼채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 자세히 주장하였다. 그런데 고구려 말기의 자료에는 공표된 것이 풍부하지 않으므로 연구에는 한계가 있다. 그 증거로서 황해남도 봉천군 봉암리(鳳川郡 鳳岩里)의 고구려 가마에 관한 보고(김영진 1997)를 인용하고 있는데, 방사성 탄소 연대는 고구려 말기에 해당하지만 갑자를 이용하여 자기를 고온에서 구었다는 사실이나 기형 등으로 보아 고구려의 가마로 보기에는 의심스럽다.

(2) 초기 고구려토기에 관한 연구

노남리형 토기가 초기 고구려토기라는 점은 일찍이 북한의 연구에서 지적되어 왔다(정찬영 1965).

북한의 리창언은, 노남리형 토기와 명도전(明刀錢)이 공반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노남리형 토기가 기원전 3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다고 보며 고구려 건국을 기원전 277년으로 하는 주장에 호응하였다(리창언 1991: 43-44). 이에 대해 남한의 박순발은 노남리형 토기는 한대(漢代) 이래 단조 철기를 수반하고 있으며, 더구나 이 지역에서는 명도전에 반량전(半兩錢)이나 오수전(五銖錢)이 수반됨을 지적하였고(朴淳發 1999: 11), 최종택은 노남리 유적에서는 평양지방에 주로 보이는 황백색토기가 공반된 점을 근거로(崔鍾澤 2000: 249), 각각 비판하였다. 여기서 든 논점은, 이미 정찬영이 지적한 것이었다(정찬영 1973: 40). 게다가 그 이전에 정찬영은 명도전만으로는 연대를 결정할 수 없음을 상세히 해설하고 있으며 복잡한 자료 조작을 실시하여 견해를 발표하였는데(정찬영 1965), 리창언의 견해는 정찬영 단계보다 후퇴한 것이었다.

중국의 이전복은 고구려 문화의 기반을 찾기 위해, 고구려 건국 전후의 유적에 대해 살펴보았다(1986). 우선 고구려 오부(五部)의 소재지를 『후한서 동이전(後漢書 東夷傳)』의 기재에 근거해 비정하였다. 즉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산성(五女山山城)이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비정되므로 이에 의해 고구려 오부 중앙에 위치하는 계루부(桂婁部)를 혼강(渾江) 중류에 비정하였고 이것을 기준으로 동쪽의 순노부(順奴部)를 압록강 유역, 북쪽의 절노부(絶奴部)를 혼강 상류, 남쪽의 관노부(灌奴部)를 혼강 하류, 서쪽의 소노부(消奴部)를 요령성 신빈현에 비정하였다가 각 지역의 漢 이전의 유적을 고구려 각부의 문화로서 열거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어서 석기와 토기가 소개되어 있다. 토기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 거친 태토로 색은 적갈색이며,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고구려 초기 토기에 가까운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李殿福 1986: 62-63). 이전복은 고구려의 건국 시에는 요동궁(遼東郡), 현도군(玄菟郡)을 통해 한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고구려 초기의 철기에 한문화의 영향을 찾는 한편 토기에 대해서는 오부 문화의 고유한 전통을 기반으로 일부 기종이나 무늬, 니질태토 등에 한문화의 영향이 보인다고 지적하였다(李殿福 1986: 65).

남한의 박순발은 고구려 건국 이전에 재지 문화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밝히기 위해 자신의 청동기 문화편년에 비추어 혼강 및 압록강 중류지역의 청동기 문화편년을 묘후산류형(廟後山類型), 공귀리류형(公貴里類型), 납랍둔류형(拉拉屯類型)이라고 정리하고 초기철기문화인 대전자류형(大甸子類型), 그라고 고구려 초기 토기인 노남리형 토기가 등장한다고 하며(朴淳發 1999) 이전복에 의한 오부 비정 범위는 노남리형 토기의 분포와 일치한다고 지적하였다(朴淳發 1999: 12).

노남리형 토기의 특징 중, 교상파수(橋狀把手)나 마연기법은 선행하는 미송리형(美松里型) 토기에 이미 보이는 반면 니질태토는 전국시대(戰國時代)말부터 漢代의 회도(灰陶)와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고 결국 노남리형 토기는 재지적(在地的) 요소와 초기철기문화에 수반된 외래 요소가 결합한 결과로 보았다(朴淳發 1999: 11). 노남리형 토기의 특징을 니질태토로서 일반화시킨 것은 문제라고 하는 최종택의 지적(崔鍾澤 2000: 248)도 있는데, 기본적인 구상은 수긍할 만 한다.

(3) 지역성에 대한 중국측 연구의 인식

중국의 위존성은 저서 『고구려고고』에서 고구려의 역사, 유적, 유물에 대해 저술하였다. 토기편년에 대해서는, 경철화・임지덕의 편년에 의거하면서, 사이전연호(최종택의 사이장경옹)에 대해 자신의 편년을 다시 논하였고 나아가 요령성 무순시 고이산성(高爾山城)에서 출토된 토기에 대해 집안의 것과는 異同이 있어 지역성이 분명하다고 하였다(魏存成 1994: 101-104).

집안지역 고구려토기를 편년한 한 사람인 경철화도 새로 출토된 고구려 시유도기를 기초로, 시유도기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2001). 이는 경철화・임지덕 편연(1984)의 제2조(중기)를 더 세부적으로 편년했다는 의미가 있다. 중국 영토내에서 출토된 壺(최종택의 四耳長頸甕, 長胴壺), 부뚜막, 분(盆), 시루, 솥, 이배, 발(鉢), 관(罐), 병(甁)을 분류하여, 이들이 출토된 고분의 연대관에 따라 배열하였다. 그 결과 집안 우산 1340호묘에서 출토된 관, 반(盤), 시루가 4세기 초까지 소급되는 가장 오래된 고구려 시유도기이다고 하였다(耿鐵華 2001: 77).

앞의 위존성의 연구(1985)와 대비하면, 큰 차이는 마선 0001호묘(吉林省博物館輯安考古隊 1964)로부터 우산 1041호묘(吉林省博物館文物工作隊 1977)에 이르는 과정을 역전시킨 점이다. 이것은 분묘의 연대관을 이용했기 때문이고 사이장경옹의 동부 형태나 손잡이의 부착 위치의 변화를 고려하면, 마선 0001호묘(耿鐵華의 A型II式), 우산 1041호묘(A型I式), 장천 2호묘(A型III式)의 순서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가타나 위존성의 경우 목이 없는 것(오가타의 B형, 魏存成의 I식)과 목이 있는 것(오가타 C형, 魏存成 II식)을 일부 중복하면서 변화한다고 생각한 데 대해, 耿鐵華는 전자를 ⌈목과 어깨 부분이 꺾어진 듯 이어진 것⌋(耿鐵華 A형I식,II식), 후자를 ⌈弧曲⌋(耿鐵華 A형III식)이라고 표현하여 제작 기법의 획기를 시사하며, 이 형태 차이로 명확한 시기차를 상정하였다(耿鐵華 2001: 73). 제작 기법의 획기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흥미롭고 평양시 삼석구역 토포리대총(土浦里大塚)에서 출토된 사이장경옹(梅原末治・藤田亮策 1966)의 형태도 설명하기 쉬워지지만, 중국북한에서 보고된 사이호의 실측도나 서술은 소략하고 특히 게재 논문마다 조금씩 도면에 차이가 있어 검증하기 힘들다.

게다가 경철화는 고구려 시유도기를 동한(東漢)대 이래로 ⌈북방유도(北方釉陶)⌋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중국 시유도기와 고구려 시유도기에는 기종 구성의 異同이 있어, 중국의 시유도기 제작 기술을 받아들이면서도 민족성을 유지하였다고 지적하였다(耿鐵華 2001: 79).

집안 산성하 0365호묘(이른바 東大坡 365호묘)에서 출토된 장경병(長頸甁, 張雪岩 1991: 605-606)은, 이미 발해의 길림성 돈화시(敦化市) 육정산(六頂山) M199호묘의 회도병(灰陶甁)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어 연대 추정의 근거가 되어 왔는데(張雪岩 1991: 605-607), 경철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 내의 말갈인(靺鞨人)들이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耿鐵華 2001: 75).

또 요령성 환인현 미창구(米倉溝)의 장군묘(將軍墓, 武家昌 외 2003)나 토포리대총의 시유된 사이장경옹에는 지역성을 인정하였다(耿鐵華 2001: 75).

이와 어불어 고구려토기 내의 민족성이나 지역성을 인정한 점이 이 글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한편 고구려 시유도기가 모두 분묘 출토품이다고 하거나(耿鐵華 2001: 71), 자료가 6세기 중반기에 감소하는 이유를 국력의 쇠퇴에서 찾았는데(耿鐵華 2001: 79), 이 글에서는 해방 후 북한에서 출토된 자료나 연구 성과에 전혀 언급이 없으며 평양 천도 후의 북한 지역에서의 시유도기는 경시되고 있다. 더구나 중국내의 고구려 유적에서도 요령성 개원시(開原市) 용담사산성(龍潭寺山城)에서 집안 고구려 고분 출토품과 비슷한 방법으로 제조된 시유도기가 출토되어(王綿厚 2002: 90), 시유도기가 부장전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산성하0365호묘에서 출토된 장경병을 말갈인의 토기로 하는 것도 의문스럽다. 말갈 토기와 발해 토기의 편년 연구(喬梁 1994; 孫秉根 1994; 臼杵勳 2004)에 의하면 그러한 형태의 시유도기는 발해 건국 이전의 말갈 토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구려토기의 계보를 이어받은 토기가 발해에서도 존속되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4) 대전, 충청도에서의 고구려토기의 분포 확대

남한에서는 경기도 연천군(京畿道 漣川郡)의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과 은대리토성(隱垈里土城), 파주시(坡州市) 주월리유적(舟月里遺蹟) 등 한강 이북의 경기도 북부에서 고구려 유적, 유물의 발견이 계속되고 있다. 서울시 광진구(廣津區) 아차산의 홍련봉(紅蓮峯) 1보루에서는 고구려 연꽃무늬 수막새 가와도 출토되었다. 게다가 고구려토기 분포는 대전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한상(李漢祥)은, 대전의 6-7세기의 백제 성곽인 월평동유적(月坪洞遺蹟-이한상의 용어로는 月坪山城, 國立公州博物館 1999)에서 출토된 고구려토기를 재보고하였다. 유구의 변천 등으로 고구려토기의 시기를 6세기경이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역사적 해석과의 연결성에 대해서는 가능성만을 지적하고 결론은 유보하였다(李漢祥 2000). 그 밖에 산성 서쪽에서도 고구려토기가 채집되었다(朴淳發李亨源 1999).

그 후 국립공주박물관 조사 지점의 북쪽 구릉 위에서 충천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축성 이전으로 보이는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축성 이전의 고구려토기는 한강 북안 보루들의 출토 유물보다 몽촌토성 출토품에 가까운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지적하였으나 그 연대에 대해서는 475-551년 사이로 넓게 보고 있다((財)忠淸文化財硏究院 2003).

해석은 향후 과제가 되겠으나 대전까지 고구려토기가 분포해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므로 삼국간 교섭 관계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芙蓉面)의 남성골 유적에서는 고구려 유구・유물과 더불어 토기가마가 발견되었다. 이는 현재 최남단에 위치하는 고구려 유구로, 충청도에서도 고구려 유적의 존재하는 것이 확실해졌다.

(5) 사비기 백제토기에 있어서 고구려토기의 영향

김용민(金容民)은 백제 사비기의 유적인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 중, 대부발(臺付鉢), 전달린토기, 접시, 보주모양토기(뒤에 ⌈煙家⌋로 개칭)에 대해 웅진기 이전의 백제 토기에는 보이지 않고, 사비기에 등장하는 기종임을 지적하고, 대부발, 전달린토기, 접시는 구의동유적이나 몽촌토성의 고구려토기와 대비, 보주모양토기에 대해서는 집안 출토 고구려토기와 대비하면서 백제 수도를 중심으로 왕실이나 상류 계층에서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 제작된 토기가 사용되었다고 추정하였다(金容民 1998: 54). 나아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시기를 6세기 중엽경으로 추정하여 백제 聖王代에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이 밖에 송국리유적(松菊里遺蹟, 權五榮 1991)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 양이파수부호나 파수부자배기에도 고구려토기의 요소가 보인다고 지적하였다.

박영민(朴永民)은 김용민이 소개한 자료에 사비기 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영향이 간취되는 백제 토기를 추가하여 이들을 ⌈고구려계 토기⌋라고 총칭하며 띠모양 파수가 부착된 사이호, 양이호, 자배기류, 시루, 접시, 이배류, 연가, 암문토기를 들었다. 그리고 사비기 백제 토기와 고구려토기의 유사점이 수많은 기종에서 확인된다고 하여 이를 고구려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며 김용민 등의 학설을 지지하였다(朴永民 2002: 237).

그러나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배경에 대하여는 백제 성왕의 한성 점령은 2년에 불과하며 일상 용기로부터 고급기종까지의 폭넓게 수용하기에는 기간이 짧고, 또 백제보다 오랜 기간 한성을 점령한 신라에는 고구려토기의 영향이 보이지 않는 점도 지적하여 김용민의 추정에 의문을 제기하였다(朴永民 2002: 237-238). 그리고 사비기 백제 토기에는 타날 기법의 사용이나 색조 등 고구려토기와 다른 요소가 있는 반면 장동호나 사이장경옹과 같은 고구려토기의 전형기종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비기 고구려토기의 제작자는 백제인이며, 고구려계 토기의 등장은 한 가지 사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떤 일시적인 문화의 도입, 급격한 백제화라는 과정⌋을 거쳤다고 추측하였다(朴永民 2002: 238).

필자의 의견을 말하면 한성 함락 이후에도 한성지역에서는 고구려 지배하에서 백제인 사회가 영위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白井克也 1992). 그곳에 남아 있던 백제인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생활 양식・도구를 수용하면서 551년에 성왕의 재점령 등의 전쟁으로 인해 백제 지배하에 복귀되어 한성지역 거주 백제인의 토기가 사비기 백제 토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김용민과 박영민의 연구는 고구려토기와 백제 토기의 식별이 정치(精緻)하게 된 것을 배경으로, 고구려토기의 영향에 의한 새 기종들이 백제 토기에 등장했음을 지적한 점이 흥미롭다. 향후 영향을 받은 시기나 그 사회적・정치적 배경에 대한 고찰의 진전이 기대된다.

다만 김용민이 예로 든 4기종 중 대부발 등에 대해서는, 백제에서는 굽이 달려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 중국과의 교류에서 들어온 중국자기나 청동합(靑銅盒)과 같은 금속용기의 굽을 모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金容民 1998: 55). 그러나 금속기의 영향을 상정한다면, 대부발의 기형 전체가 금속기의 모방일 수도 있고 반드시 고구려의 영향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양시은은 시루봉 보루에서는 부소산성 출토품과 비슷한 굽접시가 출토되었음을 지적하여 고구려토기로부터 백제 토기로의 더 직접적 영향 관계를 상정하였다(梁時恩2003a: 38).

김용민은 2002년에 이를 재론하면서 백제 유적 출토 보주모양토기의 사용법에 대해, 충청남도 부여군 화지산유적(花枝山遺蹟) 라-지구 8호 건물지 아궁이 부근에서의 출토 상황(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2002: 279-280)이나 형태로 보아 굴뚝의 부품중 연통의 상부를 장식하는 연가로 지적하며 유사한 예를 소개하였다. 나아가 ⌈倉⌋으로서 소개된 집안 우산 2325호묘 출토예에 대해서도 백제의 연가와 유사한데 대해 중국의 명기인 倉과는 차이점이 많다고 하였다(金容民 2002: 66-67). 그 한편, 충청남도 천안시 용원리유적(龍院里遺蹟)의 주거지에서 출토된 ⌈장고형 토기⌋(李南奭 2000: 476-478)가 연통을 닮았다고 하였는데, 이로 볼 때 연가의 등장도 사비기보다 소급될 가능성도 있다(金容民 2002: 70).

게다가 문제를 복잡하게 할 것은, 김용민이 소개한 관북리유적(官北里遺蹟, 尹武炳 1999)이나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연통이, 일본의 이른바 산인[山陰]지방, 즉 돗토리현[鳥取縣]시마네현[島根縣]을 중심으로 4세기경에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산인형 시루 모양 토기[山陰型甑形土器]와 흡사한 사실이다. 이 토기는 수혈 주거지에서 출토되는데, 의도적으로 파괴되어 출토되거나 주거지 벽에 붙어 세워진 상태로 출토된 것이 많으며 원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만약 백제나 고구려의 연통과 같은 것이면, 벽 옆에 세워저 있다는 것은 사용시의 상황을 나타내며, 주거지 바닥면 위에서 파괴되어 있는 것은 주거를 폐기하였을 때의 儀式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산인지방에서는 이 시기는 아직 부뚜막이 보급되지 않았으며, 한국의 영향으로 부뚜막이 등장할 때는 산인형 시루 모양 토기가 이미 소멸된 후라는 점이다. 더구나 백제나 고구려의 사례에 대해 일본의 사례는 아주 이른 단계에 속해 있다. 고구려와 백제 토기의 연통이나 연가에 관한 향후 연구는 일본의 산인형 시루 모양 토기의 계보나 용도, 등장 배경의 연구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그림 4).

(6) 일본에 있어서의 실물 자료의 검토

일본에서는 고구려토기 실물자료가 많지 않고 확실한 고구려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토기 연구가 부진하였는데, 규슈[九州] 지방의 후쿠오카시[福岡市] 하카타구[博多區]하카타[博多] 유적군의 토광SK175호에서 고구려 장동호가 출토되었다(柳澤一男杉山富雄 1985). 이 토기는 회백색으로 경질이지만 흡수성이 있어, 안팎 면이 정성스럽게 회전 물손질로 정면되었고 몸통의 하단부는 물레 위에 놓은 채 깎기 정면되었다. 몸통에는 ⌈大⌋자를 닮은 각선이 소성 후에 새겨졌다. 이 유적을 보고한 야나기사와 가즈오[柳澤一男]는, 이 토기가 구의동유적의 출토 유물에 유사함을 알았으나 당시 구의동유적은 아직 백제 유적으로 생각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제 토기로 보고하였다. 게다가 같은 유구에서 출토된 하지키[土師器] 시루를 하니와[埴輪]로 오인했기 때문에 5세기에 비정하였다. 필자는 장동호와 공반유물, 발굴 조사시의 사진이나 기록을 재조사하여 장동호의 특징을 중국・남한의 출토품이나 연구 성과와 대비하며, 그 결과 고구려 후기의 토기로 추정하였다. 아울러 같은 유구와 주변유구에서 출토된 스에키[須惠器]와 하지키를 검토하여 장동호는 7세기의 고구려토기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7세기의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에 대응하기 위해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북부 규슈에 일시 수도를 옮겼을 때, 고구려인이 가져온 토기라고 결론지었다(白井克也 1998)(그림 5). 그 후 공반된 스에키에 대한 편년관을 약간 보정하였지만, 그 결론은 유지하고 있다(白井克也 2000: 106-107). 이밖에 제작 기법의 일부에 대해 백제신라가야낙랑토기와 비교하기도 하였다(白井克也 1997).

요시이 히데오는, 일본에서 드문 실물 자료로 유명한 교토대학 종합 박물관[京都大學綜合博物館]에 소장된 갈유도기 사이호와 부뚜막에 대해 실측도를 공개하였다(吉井秀夫 2001).


4. 연구의 精密化와 한계

(1) 제작 기법의 상세 연구

양시은은 직접 관찰이 가능한 몽촌토성, 구의동보루, 아차산 4보루, 아차산 시루봉 보루의 고구려토기에 대하여, 제작 기법을 종합적이고 상세하게 조사하였고 그 결과 새롭게 중요한 지견을 얻었다(梁時恩 2003a, b).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에 대해서는 다른 기종의 전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잔 석립이나 석면(石綿), 운모 등이 보강재로 혼입된 거친 태토가 사용되었다고 하였다(梁時恩 2003a: 18). 그리고 기종이 심발에서 장동호로 대체되었다는 최종택의 견해(崔鍾澤 2000: 261)에 대해 심발형토기는 6세기에도 존재해 있었다고 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梁時恩 2003a: 19). 이를 전제로 심발에는 겉면이 불을 받아 박락이 심한 것이 많다는 관찰 결과를 통해 직접적으로 불을 받은 용도 때문에 거친 태토가 유지되었다고 추측하였다(梁時恩 2003a: 19-20). 수긍할 만 한 견해이다.

성형 기법에 대해서는, 종래 수제(手製)나 물레・회전대와 같은 도구를 사용한 것(輪製)로 나누어 생각되어 왔는데, 그는 기벽에 물레흔과 함께 테쌓기 흔적이 동시에 관찰됨을 지적하고 대부분 기종은 저부를 판 모양에 만들어 점토를 쌓아올리다가 물레로 성형했다고 하였다(梁時恩 2003a: 23-24). 지금까지 ⌈띠쌓기 물레조정(卷上轆轤製)⌋(岡崎敬 1979: 180)나 ⌈手製輪修⌋(王綿厚 2002: 184)와 같이 개괄적으로 표현된 적은 있지만 양시은과 같이 사진 등 논거를 들어 자세히 논한 예는 보기 드물다.

저부 성형에 대해서는, 저부 외면(뚜껑의 경우 천장부 윗면)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돌대와 같은 흔적(돌대흔)에 주목하여 돌대흔은 저부를 정면하지 않은 것이 많은 시루봉 출토품에서 종종 관찰되므로, 토기 성형시에 생긴 것이라고 지적하였다(梁時恩 2003a: 25). 그리고 그 해석에 대해 ①의도적인 표식, ②제작틀의 흔적, ③토기의 중심을 맞추기 위한 회전바닥판의 홈의 흔적, 등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는데, 앞의 둘을 부정하고, ③ 즉 테쌓기를 한 후 물레로 다듬을 때도 토기의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게 했다고 주장하였다(梁時恩 2003a: 26-27). 그러나 토기의 중심을 맞추기 위해서는 물레 위에 점토판을 만들어 물레를 손으로 돌리면서 대칼로 점토를 자르면 원형이 되고 테쌓기 할 때도 손으로 물레를 돌리면서 형태를 수정하면 되기 때문에 회전바닥판에 홈을 새기는 필연성은 별로 없다. 더구나 경기도 구리시 시루봉 보루(任孝宰 외 2002)나 경기도 파주시 주월리유적(京畿道博物館 1999)의 고구려토기를 관찰하면, 돌대흔에는 토기의 중심과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며 일부는 돌대흔에 평행하는 작은 段差나, 나뭇결 자국이 확인된다. 이것으로 보아 필자는 회전바닥판이 나뭇결이 곧은 판자를 여러 장 연결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돌대흔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일부 기종에 있는 굽에 대해서는, 들린굽(圈足, 高台)과 통굽(實足, 假圈足)이 있고, 이 중 들린굽의 제작 기법에는 부착방식과 깎기방식이 있으며 부착방식은 일부의 이배류나 대부완류에 보인다. 깎기방식은 시루봉에서 출토된 대부완이나 접시류에서 보여져 해무리굽처럼 물레로 굽을 깎아내었다. 깎아낸 굽은 통굽처럼 낮은 굽으로 중국 자기의 영향으로 간주해지고 있다(梁時恩 2003a: 37-38).

이 중 부착방식의 대부완은 사비기 백제 토기의 완과 공통점이 있으며 김용민의 견해(1998)를 자료적으로 보충해준다. 그러나 고구려토기에는 초기의 일부 토기를 제외하면 들린굽은 드물고 뒤의 발해 토기에도 들린굽은 거의 없다. 양시은의 관찰을 참고한다면, 통굽이 부착된 들린굽의 영향을 받아 깎아낸 굽을 파생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 경우 한강 유역 고구려토기나 사비기 백제 토기에서 부착된 들린굽의 기원이 새로 문제가 될 것이다(그림 6).

더구나 양시은은 정면기법 중 깎기 기법이나 긁기 기법이 몸체 하단부나 몸체와 바닥부가 접하는 부분에 보이는 점을 지적하여 특히 깎기에 대해 ⌈여분의 점토를 깎아 내는 방법⌋으로 추정하였는데(梁時恩 2003a: 40), 이 기법이 물레 위에서의 원판띠쌓기(円板卷上) 기법이라는 성형 기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분리 기법인 점은 이미 필자가 지적하였다(白井克也 1997).

명문(銘文)이나 부호(符號)를 가진 토기에 대해서는 접시나 완, 종지류와 같은 개인용 식기에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개인을 식별하기 위한 기호일 가능성을 지적하였다(梁時恩 2003a: 48-49).

양시은은 이러한 기법의 관찰을 종합하여, 한강 유역 고구려토기의 편년을 검토한 결과 몽촌토성의 고구려토기를 5세기 후엽, 시루봉은 6세기 중엽, 구의동과 아차산 4보루는 시루봉에 가깝지만 약간 이른 시기로 비정하였다(梁時恩: 2003a: 59-60).

이상의 양시은의 관찰은 상세하고 정확하며 고찰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 파생될 문제가 중요하다. 한강 유역에서의 고구려토기의 변천 중, 늦은 시기에 자리매김된 시루봉 출토 고구려토기의 특징은, 중국이나 북한의 고구려토기와는 다른 부분이 있다. 이것은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토기에 지역성이 생겼음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2) 상세한 연구의 부산물

남한에서 최종택과 양시은이 편년이나 제작 기법을 상세하게 논하면 논할수록 토기의 지역차, 공방관계, 용도 등에 관한 인식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남한 외의 중국이나 북한의 고구려토기에 대해서는 정보가 부족하며 연구에 지장이 생기게 되었다. 그 문제에 직면한 양시은은 남한 지역 토기를 고구려 중심지의 출토품과 비교하면 중앙과 지방의 관계양상이 문제가 됨을 지적하였다(梁時恩 2004: 866).

일본의 아즈마 우시오도 2004년에 자신의 편년안을 회고하면서 종래는 석실분에서 추장(追葬)을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기 연대관과 묘실구조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여 연대관을 일부 수정하였다(東潮 2004: 840,852-853). 그 때까지 토기편년에 분묘의 변천관을 이용한 연구는 많았는데, 많은 유적과 유물을 숙지하는 아즈마는 다양한 고고자료의 각각 편년의 정치화(精緻化)와 더불어 상호의 신중한 대비에 의한 편년이 필요함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2004년에 남한과 알본의 연구자의 제언들은, 진전된 연구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연구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종래보다 자세한 정보와 성숙한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낸 것이다.

(3) 새로운 자료의 공개

가장 자세한 최종택의 논문에서도 고구려 건국부터 200년까지의 고구려초기 토기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첫째 서울인 ⌈卒本⌋에 비정되는 요령성 환인현에서 이 시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었다. 오녀산산성과 고려묘자(이전의 고력묘자<高力墓子>) 적석묘이다. 오녀산산성에서는 산 정상에서 다섯 시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이 중 ⌈三期(=제3기)⌋의 유구에서 이른 단계의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다. 제3기의 대형 건물 유구인 F35 유구는, 전국시대 만기에서 漢초에 해당한 F3 유구 보다 상층에 있고, 위진(魏晋)시기의 H13 유구에 의해 파괴되었다. 게다가 대천오십(大泉五十) 동전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兩漢之際(서한과 동한이 교체한 기원 전후 시기)⌋에 비정되었다(李新全 2003: 259). 또 근린의 고려묘자에서는 1994년에 방단계제적석총(方壇階梯積石塚)이 연접한 ⌈串墓⌋가 조사되었으며 경철화・임지덕의 편년(1984)에 의해 ⌈고구려 전기 도기 중 상당히 이른 단계⌋에 비정되었는데(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외 1998: 22), 이신전(李新全)은 고려묘자촌의 출토 유물을 오녀산산성의 출토 유물과 대비하여 같은 시기에 비정하였다(2003: 260). 이신전이 소개한 토기는 극히 소수이지만 그의 연구를 통해 그 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고구려 건국시기의 도선(都城)분묘토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오녀산산성의 보고서가 간행되었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다섯 시기의 유구와 유물이 자세히 보고되었는데, 시기 구분과 연대에 대해서도 자세한 고찰이 실려 있다. 고구려 건국시기에 해당하는 제3기 유구나 유물은 그렇게 많지 않으나 토기의 유례가 출토된 중국 분묘와의 대비, 그리고 성내에서 출토된 서한 오수전이나 대천오십 등의 존재를 ⌈兩漢之際⌋에 비정하는 근거로 보고 현도군 내에서 중원 문화가 증가했다고 평가하였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287). 또 수교상이(竪橋狀耳)를 가진 관(최종택의 양이심발)의 유례로서 집안 만보정 0242호묘, 우산3241호묘도 들고 있다.

이신전이 위진시기에 비정한 제4기 유구와 유물은 양이 많고 편년의 기준 자료로서 유용하다. 보고서에서는 이 시기를 4세기말에서 5세기 초로 보았는데(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289), 토기 내용은 6세기경의 고구려 후기의 양상에 가깝다고 생각된다(F21의 시루, F32의 쌍이옹). 더구나 철기 교장(窖藏) JC에서 출토된 마구에 대해 일본의 모모사키 유스케[桃崎祐輔]가 지적처럼 고구려 말기에 해당하므로(桃崎祐輔 2005: 117), 제4기 문화는 고구려 말기까지 계속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환인의 성곽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자료가 제시된 것은 몽촌토성이나 아차산 보루 등에 대비할 수 있는 토기 자료를 얻은 셈이고 향후 연구의 진전이 기대된다.

중국에서 고구려 유적의 자세한 보고서가 잇따라 간행된 배경에는 정치적인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고고학 정보의 공개와 유통이 연구를 촉진시키는 것도 사실이며, 향후 더 많은 정보 공개와 유통이 기대된다.


5. 고구려토기 연구의 과제

이상 고구려토기에 관한 기존 연구를 소개하면서 필자의 견해와 금후의 연구과제에도 언급해왔다. 그러나 종래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논점도 몇 가지 남아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새로운 연구 과제에 대해 전망해 보고자 한다.

(1) 선비토기와의 대비

고구려토기의 등장 배경에 대해 북한에서는 재지의 전통을 강조하고 중국이나 남한에서는 재지 전통을 바탕으로 외래 철기 문화와의 교류를 상정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북서쪽에 위치한 선비문화(鮮卑文化)와의 관계도 향후 문제가 될 것이다. 가장 이른 단계의 고구려토기 중,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산성이나 길림성 집안시 만보정0242호묘, 우산3241호묘에서는 쌍수이심발(雙竪耳深鉢, 최종택의 兩耳深鉢)이 출토되지만, 중기 이후가 되면 거의 보이지 않는 기형이다. 이 쌍수이심발에 유사한 예는 중국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선비묘에 몇 점 확인된다.

예컨대 호륜패이맹(呼倫貝爾盟)의 찰뢰락이묘(扎賚諾爾墓, 宿白 1977)나 납포달림(拉布達林)M2호묘(趙越 1990)는 동한대와 대응하며, 수제(手製) 쌍수이심발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묘제는 모두 목관묘이고 ⌈대구장복관(大口長腹罐)⌋을 수반하는 점(內蒙古文物工作隊 1961; 趙越 1990)은 고구려의 묘제나 토기와 차이가 있다. 초기 고구려토기에는 선비 문화와의 부분적인 공통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선비 토기와 고구려토기의 서로의 형식 구조를 검토함으로써 양자의 관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개별 기종으로는 김기웅은 삼각통형용기(三脚筒形容器, 최종택의 円筒形三足器)의 원류를 한대 동제렴(銅製奩)에서 찾았다(金基雄 1985: 20). 그러나 기형의 연원을 중원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선비묘에서도 염형 토기의 출토예가 있다. 요령성 심양시의 북북서 150 km, 내몽고자치구 철리목맹 과이비좌익후기(哲里木盟 科爾泌左翼後旗)에 위치한 신승둔(新勝屯) 선비묘(田立坤 1997)에서는 분묘에는 수반하지 않았지만 채집품으로 염형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염이 선비에게 수용되어 선비 토기를 매개로 고구려에 원통형삼족기가 성립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그림 7).

모모사키 유스케는, 새로 공표된 집안 지역의 발굴 성과(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를 기초로, 우산 0541호묘(太王陵)을 광개토왕릉으로 하는 설을 지지하였다(桃崎祐輔 2005). 극동 기마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선비로부터 고구려, 신라, 가야, 왜의 마구의 비교 연구를 통해 연대를 논한 점이 특징이다. 토기에 관한 언급은 없으나 향후 유물 복합체를 통한 지역 편년, 지역간의 교차편년 등에 큰 진전을 제공할 것이다.

선비는 고구려와 인접해 있었고 4-5세기에는 고구려와 화평과 전쟁을 되풀이하였다. 마구 등을 비롯한 문화의 교류도 있었을 터이며, 선비토기와 고구려토기의 대비도 금후 과제가 될 것이다.

(2) 말갈토기발해토기와의 대비

고구려토기가 발해 토기에 계승되었다는 점에 대해 남한 및 북한의 연구는 일치를 보고 있다. 게다가 중국이나 일본의 연구자들도 발해 토기에는 고구려토기와 자주 비슷한 기종들이 있음을 인식하며 발해 토기와 비슷한 고구려토기는 고구려 후기의 토기라고 생각되고 있다.

경철화임지덕의 편년(1984)에서 고구려토기 제3조(후기)에 자리매긴 집안 민주육대유적(民主六隊遺蹟) 출토품은 그 후 색조나 조형이 집안 고구려 유물과는 다르다고 하여 발해 유물로서 보고되었다(集安縣文物保管所 1985). 출토 위치는 온돌의 아궁이이며 생활 유적에서의 일괄 출토 유물로서 귀중하며, 고이산성(徐家國孫力 1987)이나 오녀산산성(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의 유례로 보아 고구려 말기에 비정해도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나 시기에 대한 의견이 구구하다(그림 8).

집안 산성하0365호묘에서 출토된 시유도기 장경병은, 발해의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M199호묘의 회도병과 유사한데 장설암(張雪岩)은 산성하0365호묘를 6세기말에서 7세기 초에 비정하였다(張雪岩 1991: 605-607). 위존성은 장경병을 남북조 말기의 반구병과 대비하며, 장설암과 거의 같은 연대관을 제시하였다(魏存成 1994: 76), 경철화는 고구려내의 말갈인이 이용한 것으로 보고 6세기말로 보았다(耿鐵華 2001: 78). 한편 동장부(董長富)는 이것을 ⌈전형적인 발해 그릇⌋이라고 하며, 앞의 민주육대유적 출토유물과 함께 발해 시대로 시기를 내렸다(董長富 1997: 56).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는, 고구려 후기 토기의 기준 자료의 부족 탓도 있으나 발해 토기의 편년과 형식 구조가 충분히 판명되지 않는 것도 한 요인이다.

말갈 토기와 발해 토기에 대하여 중국의 교량(喬梁; 1994)과 손병근(孫秉根; 1994)의 연구를 보면, 모두 발해 건국이전의 말갈 토기로부터 발해 멸망 시점까지를 취급하였다. 두 논문에는 공통된 부분과 다른 부분이 있어도 모두 말갈로부터 발해로의 계승을 강조하고 있다. 고구려토기와의 관계에 대해 교량은 발해 토기에 지역성의 존재를 지적하며 일부 기종은 고구려토기에서 유래를 찾았다(喬梁 1994: 40-41). 한편, 손병근은 말갈로부터 발해로의 일계적인 계승만을 강조하며 고구려-발해 계승설을 비판하였다(孫秉根 1994: 222).

고구려토기와 발해 토기가 식별하기 어려운 것은 고구려와 발해 사이의 계승성을 부정 또는 소홀히 하는 중국 고고학의 자세에서도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로부터 발해로의 계승만을 강조하는 북한 고고학의 견해도 일면적이다.

길림성 요원시(遼源市) 용수산성(龍首山城) 내의 묘장(墓葬)M1에서는, 발해 조기의 이질회색토기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후기 토기와 유사하고 집안 민주육대유적 토기와 흡사한데, 용수산에서는 적은 량의 말갈 토기를 수반하였다(唐洪源 2000). 그 이전의 말갈 토기는, 고구려토기와는 형태가 다르며 구연부에 부가퇴문(, 附加堆紋=돌대)이 달린 특징이 있다. 부가퇴문은 고구려토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발해 토기에는 말갈 토기를 계승한 부분과 고구려토기를 계승한 부분이 있다. 북한의 기존 연구에서는 발해 토기 중 고구려토기와 비슷한 부분만 강조하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발해 토기의 세부편년을 진행하는 동시에 발해 토기의 형식 구조를 분석하여 말갈계 토기와 고구려계 토기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발해연구뿐만 아니라 고구려 후기 토기 연구에도 큰 진전을 가져올 것이다.

(3) 정보의 공개와 유통

중국 위존성의 저서 『고구려고고』에서는, 서술은 중국 길림성요령성을 중심으로 하여, 북한 지역의 유적에도 조금만 언급하였지만, 남한의 고구려 유적에는 언급이 없다. 더구나 외국 연구는 일본의 것밖에 인용하지 않았다. 특히 토기에 대해서는, 북한의 출토예조차 거의 외면하였다. 왕면후(王綿厚)도 중국 동북지방뿐만 아니라 북한의 고구려 성곽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논하였으나 남한의 고구려 보루에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토기에 대해서는 중국내의 것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중국측 연구는 단편적으로 인용하지만 남한이나 일본의 연구는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물론 남한에서의 고구려 유적의 발견이나 고구려 연구의 동향도 언급되지 않는다.

한편 남한에서는 현대의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국, 북한의 고구려 연구의 성과를 받아들여 새로운 연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연구 성과가 중국, 북한에서 이용되지 않는 것은 고구려 연구자 모두에게 큰 손실이 될 것이다.

고구려 연구는 정보 공개와 유통에 의해 발전되어왔다. 앞으로도 유적, 유물, 연구 성과가 서로 공개되어야 만이 고구려 연구는 더욱 발전할 것이다. 특히 실물 자료의 관찰이 필수적인 토기 연구에서 정보의 편재(偏在)는 치명적이다.

정보 공개와 유통이야말로 고구려토기 연구의 최우선 과제이며 현재 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맺음말

이 글에서는 고구려토기 연구의 성과와 과제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고구려토기 관계논문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하였으나 이 20년 동안 다양하고 흥미로운 논문들이 나왔음을 알게 되어 놀랐다. 필자의 역부족으로 각 논문의 일부만을 표면적으로만 언급했을 뿐이지만, 앞으로 연구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고구려 연구가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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